꼬리를 무는 그날 이야기 3120번째 꼬마 시즌3 이리역 열차 폭발 사고 2주 하춘화

꼬리를 감는 그날의 이야기 연출 황성준, 백시원 출연 장도연, 장현성, 장성규 방송 2021 SBS 꼬리감는 그날 이야기 연출 황성준, 백시원 출연 장도연, 장현성, 장성규 방송 2021, SBS

꼬리를 무는 그날의 이야기3 120화 꼬마야 시즌3, 이리역 열차 폭발사고 하춘화, 이주일은 생명의 은인 꼬리를 무는 그날의 이야기3 120화 꼬마야 시즌3, 이리역 열차 폭발사고 하춘화, 이주일은 생명의 은인

지난 21일 방송된 SBS ‘꼬리에 꼬리를 감는 그날의 이야기3’ 이하 ‘꼬꼬무’ 시즌3 120회에서는 ‘1977 사라진 도시와 맨발의 남자’라는 부제로 국제 최악의 열차 사고가 발생한 이리역 열차 폭발 사고를 조명했습니다. 지난 21일 방송된 SBS ‘꼬리에 꼬리를 감는 그날의 이야기3’ 이하 ‘꼬꼬무’ 시즌3 120회에서는 ‘1977 사라진 도시와 맨발의 남자’라는 부제로 국제 최악의 열차 사고가 발생한 이리역 열차 폭발 사고를 조명했습니다.

1977년 11월 11일 전북 이리의 유일한 공연장인 삼남극장에는 수백 명의 관객이 당대 최고의 가수 하춘화를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1977년 11월 11일 전북 이리의 유일한 공연장인 삼남극장에는 수백 명의 관객이 당대 최고의 가수 하춘화를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재활용의 여왕으로 불리며 역대급 신드롬을 일으켰던 그가 무대에 오르기 전 개그맨 이주일이 무대에 올라 바람을 잡았는데, 그 순간 귀가 찢어질 것 같은 굉음이 들려오며 극장 천장이 무너져 내렸습니다. 눈 깜짝할 사이에 아비규환이 된 극장. 그러나 극장뿐만 아니라 이 거리가 한순간에 처참하게 변해버렸는데도 길가는 파편으로 뒤덮이고 집과 건물은 무너졌으며 그 안에서 서로를 찾아 헤매려는 외침과 몸부림이 가득했습니다. 재활용의 여왕으로 불리며 역대급 신드롬을 일으켰던 그가 무대에 오르기 전 개그맨 이주일이 무대에 올라 바람을 잡았는데, 그 순간 귀가 찢어질 것 같은 굉음이 들려오며 극장 천장이 무너져 내렸습니다. 눈 깜짝할 사이에 아비규환이 된 극장. 그러나 극장뿐만 아니라 이 거리가 한순간에 처참하게 변해버렸는데도 길가는 파편으로 뒤덮이고 집과 건물은 무너졌으며 그 안에서 서로를 찾아 헤매려는 외침과 몸부림이 가득했습니다.

이 사고는 바로 국내 최악의 열차사고인 이리역 폭발사고로 1400명의 부상자와 59명의 사망자가 발생한 이 사고로 인해 이리역 반경 8km 이내까지 큰 피해를 입었습니다. 특히 선로 옆 창인동의 전체 가구 43%가 붕괴되었습니다. 늑대는 순식간에 폐허가 되고 아수라장이 되었는데, 가장 중요한 폭발 원인은 무엇일까? 이때 기자의 감으로 시라코역 주변을 살피던 나훈 기자는 맨발로 새 신발을 신고 떨던 수상한 남자를 발견했습니다. 이 사고는 바로 국내 최악의 열차사고인 이리역 폭발사고로 1400명의 부상자와 59명의 사망자가 발생한 이 사고로 인해 이리역 반경 8km 이내까지 큰 피해를 입었습니다. 특히 선로 옆 창인동의 전체 가구 43%가 붕괴되었습니다. 늑대는 순식간에 폐허가 되고 아수라장이 되었는데, 가장 중요한 폭발 원인은 무엇일까? 이때 기자의 감으로 시라코역 주변을 살피던 나훈 기자는 맨발로 새 신발을 신고 떨던 수상한 남자를 발견했습니다.

화약 호송원이었던 신 씨를 발견한 기자는 그가 폭발과 관련이 있다고 생각했고, 국내 유일의 화약회사 직원이었던 신 씨는 인천에서 광주까지 화약 배달 업무를 담당했습니다. 그리고 그가 배달하던 화약 중 가장 많은 양은 다이너마이트였습니다. 나훈 기자는 그를 경찰에 넘겼고, 경찰 조사가 시작됐는데, 그리고 조사 끝에 신 씨가 화약상자를 옆에서 차고 있던 촛불이 폭발의 시초가 된 것을 확인했습니다. 화약 호송원이었던 신 씨를 발견한 기자는 그가 폭발과 관련이 있다고 생각했고, 국내 유일의 화약회사 직원이었던 신 씨는 인천에서 광주까지 화약 배달 업무를 담당했습니다. 그리고 그가 배달하던 화약 중 가장 많은 양은 다이너마이트였습니다. 나훈 기자는 그를 경찰에 넘겼고, 경찰 조사가 시작됐는데, 그리고 조사 끝에 신 씨가 화약상자를 옆에서 차고 있던 촛불이 폭발의 시초가 된 것을 확인했습니다.

열차 대기 중 저녁 겸 술을 마신 신씨는 화약열차 문을 열고 들어와 화물칸 한가운데 침낭을 깔았는데, 그 옆에는 각종 화약연료 수십 상자가 쌓여 있었습니다. 그러던 중 신씨는 쌀쌀한 날씨에 머리밭에 촛불을 켜고 잠이 들었는데, 그리고 그가 깨어나자 이미 화약상자에 불이 붙어 있었습니다. 7년간 호송원으로 있던 신씨가 화약상자 옆에서 촛불을 밝힌 것은 이번이 처음이 아니었지만 취사도구로 밥과 라면까지 끓여먹었다는 충격적인 증언이 나왔습니다. 화약에 대한 기본적인 상식이 전혀 없었습니다. 열차 대기 중 저녁 겸 술을 마신 신씨는 화약열차 문을 열고 들어와 화물칸 한가운데 침낭을 깔았는데, 그 옆에는 각종 화약연료 수십 상자가 쌓여 있었습니다. 그러던 중 신씨는 쌀쌀한 날씨에 머리밭에 촛불을 켜고 잠이 들었는데, 그리고 그가 깨어나자 이미 화약상자에 불이 붙어 있었습니다. 7년간 호송원으로 있던 신씨가 화약상자 옆에서 촛불을 밝힌 것은 이번이 처음이 아니었지만 취사도구로 밥과 라면까지 끓여먹었다는 충격적인 증언이 나왔습니다. 화약에 대한 기본적인 상식이 전혀 없었습니다.

화약회사는 화약류 취급면허가 없는 사람에게 호송 업무를 맡겼고, 해당 회사에는 화약류 취급면허증을 소지한 사람이 단 한 명도 없었던 것으로 밝혀져 더욱 충격을 주었습니다. 이 사고로 허성원 신 씨는 물론 그에게 일을 맡긴 화약회사 대표도 바로 구속됐습니다. 그리고 하루 종일 이리역에 화약 열차를 방치한 배차 담당자도 구속됐는데도 급행료를 내지 않았다는 이유로 하루 종일 열차를 방치시킨 것입니다. 화약회사는 화약류 취급면허가 없는 사람에게 호송 업무를 맡겼고, 해당 회사에는 화약류 취급면허증을 소지한 사람이 단 한 명도 없었던 것으로 밝혀져 더욱 충격을 주었습니다. 이 사고로 허성원 신 씨는 물론 그에게 일을 맡긴 화약회사 대표도 바로 구속됐습니다. 그리고 하루 종일 이리역에 화약 열차를 방치한 배차 담당자도 구속됐는데도 급행료를 내지 않았다는 이유로 하루 종일 열차를 방치시킨 것입니다.

그런데 사고 규모에 비해 적어 보이는 사망자 수가 의문을 품었는데, 당시 신원 미상의 희생자는 공식 사망자에서 제외됐기 때문입니다. 특히 이리는 많은 다른 지역 사람들이 머무는 곳이었기 때문에 신원이 밝혀지지 않은 사람이 많았다고 한다. 또 이리역 바로 옆 홍등가에서 일하던 여성들도 공식 사망자 집계에서 제외돼 세상에서 흔적도 없이 사라져 버렸습니다. 그런데 사고 규모에 비해 적어 보이는 사망자 수가 의문을 품었는데, 당시 신원 미상의 희생자는 공식 사망자에서 제외됐기 때문입니다. 특히 이리는 많은 다른 지역 사람들이 머무는 곳이었기 때문에 신원이 밝혀지지 않은 사람이 많았다고 한다. 또 이리역 바로 옆 홍등가에서 일하던 여성들도 공식 사망자 집계에서 제외돼 세상에서 흔적도 없이 사라져 버렸습니다.

참사를 일으킨 신씨에 대해 검찰은 무기징역을 구형했지만 법원은 미필적 고의에 의한 폭발성 물건파열 사상죄로 징역 10년을 선고받았고 이는 확정됐습니다. 그리고 화약회사 사장은 1심에서는 징역 8개월을 항소심에서는 벌금 20만원으로 감형받았는데, 그러나 그는 이후 대국민 사과와 함께 이리역 주민들이 일상으로 돌아갈 수 있도록 90억원을 내기로 했습니다. 참사를 일으킨 신씨에 대해 검찰은 무기징역을 구형했지만 법원은 미필적 고의에 의한 폭발성 물건파열 사상죄로 징역 10년을 선고받았고 이는 확정됐습니다. 그리고 화약회사 사장은 1심에서는 징역 8개월을 항소심에서는 벌금 20만원으로 감형받았는데, 그러나 그는 이후 대국민 사과와 함께 이리역 주민들이 일상으로 돌아갈 수 있도록 90억원을 내기로 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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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시 사고를 함께 겪은 하춘화는 이재민을 돕는 공연을 하며 수익금을 모두 이리시에 기부했고, 또 최근 진행된 40기 추모공연에도 참여하는 등 그에게 이리는 함께 생사고락을 견뎌냈기에 잊을 수 없는 도시였습니다. 이렇듯 이렇게 사람들은 상처를 다스리고 일상으로 회복했지만 가족과 소중한 사람들을 잃은 사람들의 마음만은 회복할 수 없었습니다. 당시 사고를 함께 겪은 하춘화는 이재민을 돕는 공연을 하며 수익금을 모두 이리시에 기부했고, 또 최근 진행된 40기 추모공연에도 참여하는 등 그에게 이리는 함께 생사고락을 견뎌냈기에 잊을 수 없는 도시였습니다. 이렇듯 이렇게 사람들은 상처를 다스리고 일상으로 회복했지만 가족과 소중한 사람들을 잃은 사람들의 마음만은 회복할 수 없었습니다.

이리역 폭발사고 이후 1981년 경산에서는 또다시 대형열차사고가 일어났습니다 사망자는 55명 중 254명이 중경상을 입었습니다. 이 사고에 시민들은 가만히 있지 않았지만 헌혈 캠페인을 벌이고 적극적으로 나서 경산 시민의 회복에 힘썼습니다. 그렇게 극복을 돕는 손길이 반복되고 반복되는 참사를 초래하면서 도움이 도움을 만들어냈습니다. 이리역 폭발사고 이후 1981년 경산에서는 또다시 대형열차사고가 일어났습니다 사망자는 55명 중 254명이 중경상을 입었습니다. 이 사고에 시민들은 가만히 있지 않았지만 헌혈 캠페인을 벌이고 적극적으로 나서 경산 시민의 회복에 힘썼습니다. 그렇게 극복을 돕는 손길이 반복되고 반복되는 참사를 초래하면서 도움이 도움을 만들어냈습니다.

이리시는 그 후 익산시가 되었고, 사고 피해자는 보상으로 자신의 집을 갖게 되거나 보상금 등을 받게 되었습니다. 이에 어떤 사람은 시라코역 폭발 사고가 오히려 전화위복이 되는 것이 아니냐며 사고 덕분에 잘 살게 된 것 아니냐는 이야기를 했습니다. 이리시는 그 후 익산시가 되었고, 사고 피해자는 보상으로 자신의 집을 갖게 되거나 보상금 등을 받게 되었습니다. 이에 어떤 사람은 시라코역 폭발 사고가 오히려 전화위복이 되는 것이 아니냐며 사고 덕분에 잘 살게 된 것 아니냐는 이야기를 했습니다.

그러나 사고로 가족을 잃은 생존자는 그런 말을 들을 때마다 상처를 후비는 것 같아 아프다고 했지만 적어도 누군가의 희생에서 비롯된 발전이라면 마냥 기뻐할 수만은 없지 않느냐고 반박했지만 여전히 살아남은 자에게는 이리역 폭발사고는 상처로 남았다는 말을 남겨 안타까움을 자아냈다. 그러나 사고로 가족을 잃은 생존자는 그런 말을 들을 때마다 상처를 후비는 것 같아 아프다고 했지만 적어도 누군가의 희생에서 비롯된 발전이라면 마냥 기뻐할 수만은 없지 않느냐고 반박했지만 여전히 살아남은 자에게는 이리역 폭발사고는 상처로 남았다는 말을 남겨 안타까움을 자아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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